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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에쓰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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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하라 에쓰지로는 일본의 정치인, 정치학자이다. 1877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나 미국 유학 후 런던정경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메이지대학교 등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며 민본주의에 입각한 국민주권론을 주장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에 참여했다. 중의원 의원을 13번 역임했으며, 가토 다카아키,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참여관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정익찬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종전 후 일본자유당 결성에 참여하여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국무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1962년 사망했으며, 일본국헌법 제9조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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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에쓰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衆議院副議長の頃(1932年/昭和7年)
이름우에하라 에쓰지로
한자 표기植原 悦二郎
로마자 표기Uehara Etsujirō
출생일1877년 5월 15일
출생지나가노현 아즈미노시 메이세이
사망일1962년 12월 2일
국적일본
직업정치인
학력워싱턴 주립 대학교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학위정치경제학 박사 (런던 대학교)
정치 경력
소속 정당입헌국민당
혁신구락부
입헌정우회
일본자유당 (1945-1948)
민주자유당 (일본)
자유당 (일본 1950-1955)
일본자유당 (1953-1954)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일본)
관직
직책내무대신
총리요시다 시게루
임기 시작1947년 1월 31일
임기 종료1947년 5월 24일
이전오무라 세이이치
다음가타야마 데쓰 (대행)

2. 생애

우에하라 에쓰지로는 나가노현 아즈미노시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를 여의었다. 요코하마 세관 등에서 일한 후, 1899년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정경대학교 대학원에서 1910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1년 귀국 후, 메이지대학교, 릿쿄대학교 등에서 정치학 강사로 일하며 국민주권 이론을 지지하며 다이쇼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1917년 일본 총선거에서 헌정국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 제2차 세계 대전까지 13선 의원을 지냈다. 이누카이 쓰요시의 개혁을 지지하며 헌정정우회로 당적을 옮겼다.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통신성 의원, 1926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외무성 의원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중의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1939년 헌정정우회 분열 당시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정통파"에 가담했다.

대정익찬회에 비판적이었으며, 1941년 하토야마와 오자키 유키오와 함께 반(反) 요산회 그룹을 결성했지만, 1942년 일본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전시 중 일본 외무성에서 도고 시게노리 밑에서 일하며 전쟁 종식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자유당(1945-1948) 결성에 기여했다. 요시다 시게루 초대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일본 헌법 일본 헌법 제9조에 반대했다.

1955년 중의원 외교위원장을 역임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우에하라 에쓰지로는 1877년 현재의 나가노현 아즈미노시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견직공장, 요코하마 세관 등에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1][2] 1899년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간 비즈니스 뉴스레터 '일미상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07년 워싱턴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정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여 1910년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 2. 학자 및 정치 활동

1911년 귀국 후, 메이지 대학교, 릿쿄 대학교, 도쿄공업대학교에서 정치학, 비교헌법론,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1][2]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에 대해, 천황에게는 통치권이 있지만 주권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론을 주장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1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헌정국민당 공천으로 나가노현 지역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13선 의원을 지냈다. 이누카이 쓰요시의 개혁을 지지하며 혁신구락부, 헌정정우회 등에서 활동했다.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통신성 참여관, 1926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외무성 참여관을 역임했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중의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1939년 헌정정우회 분열 당시에는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정통파'에 가담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우에하라는 대정익찬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1941년 하토야마 이치로, 오자키 유키오 등과 함께 반(反)익찬회 그룹인 동교회를 결성했다.[3] 1942년 총선에서 낙선했으나,[3] 전시 중 외무성 예산위원회에서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밑에서 일하며 전쟁의 조기 종식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우에하라는 하토야마 이치로, 아시다 히토시 등과 함께 일본 자유당(1945-1948) 결성에 기여했다. 초대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국무대신, 이후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일본국 헌법 공포서에 서명했다. -- 그는 일본국 헌법 제9조에 대해 "독립국이면서 군대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이상하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4]

2. 4. 말년 및 사망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반둥)에 일본 대표단 일원으로 중의원에서 파견되었다.[5] 1961년 7월,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방문하여, 타이완에서 장개석 총통과 회견했다.[5]

1962년 12월 2일, 고혈압성 동맥경화증으로 사망, 향년 85세. 법명은 홍순원 법의일열대거사. 장례식은 12월 7일에 자유민주당 장으로 거행되었다.[5] 묘소는 아오야마 묘원(1로-8-1).

3. 사상 및 평가

우에하라 에쓰지로는 메이지 대학교, 릿쿄 대학교, 도쿄 공업대학교의 전신에서 정치학 강사로 일하며 비교법 이론과 헌법을 가르쳤다.[2] 국민주권 이론을 지지하여 다이쇼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누카이 쓰요시의 개혁을 지지했으며, 1942년 일본 총선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대정익찬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4]

전시 중에는 일본 외무성 예산위원회에서 도고 시게노리 밑에서 일하며 반전적인 입장을 보이며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는 것이 외무성의 임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4] 1955년에는 중의원 외교위원장을 역임했다.

3. 1. 국민주권론과 자유주의

우에하라 에쓰지로는 국민주권(popular sovereignty) 이론을 지지했는데, 이는 다이쇼 민주주의(Taishō democracy) 운동의 기반 중 하나였다.[2] 그는 통치권은 천황에게 있지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은 제9조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에서도 드러났는데, 그는 이 조항이 주권 국가(sovereign nation)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6]

3. 2.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우에하라는 하토야마 이치로, 아시다 히토시와 함께 일본 자유당(1945-1948) 결성에 기여했다. 초대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 이후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일본 헌법의 일본 헌법 제9조에는 주권 국가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

4. 수상

참조

[1] 웹사이트 植原 悦二郎 https://kotobank.jp/[...] 日外アソシエーツ
[2] 논문 創立八十周年記念特集号刊行に当って https://rikkyo.repo.[...] 立教大学経済学部
[3] 뉴스 都会議員立候補者一覧表 朝日新聞 1943-09-08
[4] 서적 戦後政治裁判史録 1
[5] 서적 八十路の憶出
[6] 서적 八十路の憶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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